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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장을 넘기니 마지막장이 나오더라 - 쌍화점

<CHRIS> 2009. 1. 1. 15:57

[내용누설 있음]

대학교 1학년 때던가, 드로잉 수업에서 대부분은 옷 입은 사람을 그렸지만, 누*를 그릴 기회가 꽤 있었다. 대부분 여자 모델을 그렸지만 딱 2번 남자 모델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남자 모델의 수요가 적어서 비싸서 자주 못 부른단다. -_-;) 자리를 잡다보니 첫번째는 뒷모습을, 두번째는 앞모습을 그리게 되었다.

스무살 꽃다운 아가씨들(아저씨도 있었지만)이 모여서 멀쩡하게 생긴 젊은이의 훌떡 벗은 앞모습을 그리는데 어찌 두근두근하지 않았겠냐만, 지금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신기한 일이 그 때 그 분의 앞부분(특히 하반신의 므흣한 그 부분!)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다.(아깝게스리 -_-) 4시간 동안 나름 수영 선수같은 몸매에 나보다 몇 살 정도 많아보이는 젊고 잘생긴 총각을 보며 친구들과 수근수근대면서, 그림을 그린답시고 '뚫어져라' 보면서 관찰했는데 말이다. 어렴풋이 얼굴의 인상은 기억이 나는데(얼굴은 제법 잘생겼었다고) 나머지는 진짜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렇다고 내가 그 부분을 빼고 그린 것도 아닌데!

영화 얘기를 시작도 하지 않고 왜 그 때 이야기를 꺼내느냐하면, 아무리 므흣한 모습일지라도 커다란 그림 속 하나의 부분으로 녹아들었을 때, 그건 그저 신체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거다. 지난번 영화 색.계를 보고나서도 영화가 끝난 후 머릿 속에 강하게 남은 장면들은 온갖 신문 기사를 장식했던 삐리리한 장면이 아니라 후반부에 반지를 선물 받으며 순간 갈등하던 여배우의 표정과 100미터 도움닫기하듯 도망치던 남배우의 심리전환이었던 것처럼.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꽝이었다!

012


주인공들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3D의 입체적인 심리묘사는 없고 그저 '그랬다'라는 2D의 평면적인 사실만 있을 뿐이었다.

왜 왕과 신하는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는지, 왕은 왜 하필 그 신하를 왕비에게 보냈는지, 그 신화와 왕비는 말그대로 '안되는줄 알면서'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뭐 이런 심리적인 스토리 라인이 전~혀 이어지지 않아!

초반부터 다짜고짜 왕과 신하가 헐떡이면서 베갯잎 송사를 나누시고, 이 후 억지로 끌려 몸을 섞은 신하와 왕비가 결국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는데 이게 정말 사랑하는 사이인건지, 아니면 단지 '이제서야 여색의 신비에 눈을 뜬 남자'와 '십년 넘게 독수공방 독야청청하시다 비로소 신체적 욕구불만을 해소한 여자'가 윈윈하며 행하는 '행위'인건지 당췌 감정의 묘사가 없으신거다. 오로지 상반신 클로즈업, 그리고 하반신, 다음은 전신, 그리고 또 하반신...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피로해지는...-_-;;; 이건 뭐 내용을 위한 장면이 아니라 장면을 위한 내용인 것이다.

무려 133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호흡조절이라는 것을 상실한 채 정신없는 이야기를 나열한 결과는 극심한 피로감이었다. 정말 영화보고 나서는 그 순간에 온 몸이 그렇게 피곤할 수가 없었다. -_-; 영화 시작 5분 후부터 화살이 목을 뚫고 손발이 잘리더니 내용이 진행되는가 싶으면 침실에서 상반신, 그리고 하반신...그리고나니 또 칼부림이 퍽퍽퍽...정말 피곤하다피곤해...

상반신 하반신 클로즈업에 신경쓸 게 아니라, 좀 더 미묘한 감정선에 신경을 쓰셨으면 좋았을 것을. 사실 두 남자가 훌렁 벗고 침상에 있을 때보다, 몰래 왕비를 만나고 돌아오던 날 밤 자기 옆에서 자고 있는 왕에게 조용히 다가가 살포시 안겨 죄책감을 느끼던 신하의 그 한 장면이 영화 속에서 가장 가슴 아프고 에로틱해보이기까지 했다고...

왕이 그렇게 공을 들여 키웠건만, 별로 왕에게 헌신하지 않는 호위대. ^^;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면서 신하와 왕비를 연기하는 배우의 연령대 설정이 미묘하게 아쉬웠다. 왕이나 왕비에 비하면 조금은 어린 듯 풋풋한 흔적이 남아있는 소년이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여성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그런 소년과 관계를 가진, 소년에 비하면 다소 나이가 많은 왕비는 그렇게 욕망으로 가득차서 철없이 덤벼드는 어린 소년에게 이성적으로는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끌리게 된다면... 그래서 어느새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더라...라는 식으로 풀어나갔다면 조금 더 공감이 되지 않았을까. 처음엔 나이차이가 제법 나는 것처럼 보이던 왕과 신하의 아역이 어른이 되자 친구같이 보인데다, 두 남자에 비해 왕비가 너무 어려보여서 단지 신하와 왕비라는 젊은 두 남녀가 만났다...라는 정도밖에 표현이 안 된 것 같다.

이 영화가 어디 외국에 수출이라도 될까 두려움에 떨 정도였다. 왕이 남의 나라 속국으로 사는 치욕 속에서 으찌 저리 나랏일은 안하시는겐지! 아, 해도해도 할 이야기가 쏟아져나오는군...-_-;;;


두근거리는 맘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더니 다음장이 마지막장이더란 허무한 사실. 내용이 없엇!